마주치다

마주치다 서재 2011. 11. 1. 23:48


 오늘도 그와 마주쳤다. 

 우유가 똑 떨어져서 겸사겸사 장을 보려고 집을 나오는데 바로 그가 보였다. 회색 스웨터 안에 받쳐 입은 검은색 티셔츠는 스웨터보다 조금 길어서 스웨터 바깥으로 삐죽 나와 있었고 청바지는 그냥 무난했다. 깔끔하게 갖춰 입은 옷, 다부진 체격, 그리고 그의 매서운 얼굴, 그리고 눈매. 그에게 관심이 있냐고? 아니, 전혀. 그냥 그를 보게 되면 나는 절로 고개가 돌아간다. 그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예전에 그와 무슨 일이 있었느냐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냥, 그의 매서운 얼굴이 나를 노려보는 것만 같아서 절로 고개가 돌아갈 뿐이다. 이것도 일종의 관심이라면 관심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이성으로서 그에게 관심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절대 그건 아니다. 그냥 하나의 인간 개체로서 관심이 있다고 하면 맞겠지. 나는 그냥 그를 '한 사람'으로 인지하고 있다. 성별이 남자이기 때문에 '그'라고 할 뿐이지.

 이 집에 이사 와서 달력을 세 번 바꾸는 동안 아마도 나는 그와 무수히도 눈이 마주쳤고, 그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가끔 소일거리삼아 창문을 열고 바깥을 바라볼 때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앞 집이 바로 그가 사는 집이니까. 더군다나 그 집은 거실이 통유리로 되어있어 블라인드나 커튼을 걷는 여름이라도 된다치면 그 집의 상황을 원치않게 보게 되는 경우도 많았으니 말이다.

 내가 주로 보았던 그의 모습은 '현관 앞에서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었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려고 창문을 열거나 하면 그는 어김없이 자기네 집 현관 앞에 마련된 커다란 양철 재떨이통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사시사철 다르지 않은 후줄근한 차림새로. 항상 반바지를 입은 채로 여름이면 상의도 없이 살가죽 하나만으로. 그 외엔 반팔티. 상의가 제법 봐줄만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가히 멋져보이진 않다. 오히려 빈티나고 없어보이고 가끔은 안되 보였을 뿐. 아마 그가 사람들이 많이 왔다갔다거리는 길가에서 그 꼬라지로 있었다면 그의 양철 재떨이통에는 담뱃재와 다 피고 버리는 담배가 아니라 동전, 더러는 지폐로 그득했을 것이라고 나는 조심스럽게 상상을 해 본다.

  나의 이상한 버릇이라면 이상한 버릇이라는 게-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내가 하는 일 때문에 생긴 습관이니까 직업병 쯤이라고 할까? 그렇게 말하자니 거창해 보이는데 전혀 그렇진 않지만-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이다. 대충 저 사람의 체형은 어떨까? 어떤 골격을 가지고 있고 몸상태는 어떨까?...라는 것.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서 가끔씩 그런걸 슬쩍슬쩍 살펴보고 눈이 가는 사람들은 흘끗흘끗 보면서 어떤 느낌이겠다 하는 걸 대충, 아주 개략적으로 파악해 본다. 그리고 자주 보는 사람들은 관찰과 더불어서 하나의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거다. 그 사람에 대한 내 나름의.

 일례로 예전에 잠시 출퇴근을 하면서 같은 역, 같은 칸에 탔던 한 여자가 있었다. 나보다 두어 정거장을 먼저 내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여자의 행동이 가만 보면 재미있는 게다. 어떤 날은 채 말리지 못한 머리로 나오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승강장에서 열차가 오는 동안의 짧은 여유를 만끽하며 또 어떤 날은 양 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 있고. 볼 때마다 미묘하게 다른 모습들이 있어서 나는 자연스럽게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 여자의 상태를 보면서 '아, 오늘 아침의 그녀는 어땠겠구나' 하고 열차를 타고 사무실로 가는 그 짧지 않은 시간동안 스토리를 써 보는 게다. 그걸 쭉 글로 써놓았다면 어땠을까. 내가 쓰는 그녀의 상상일기. 쓰고 나니까 나 좀 변태 같은데? 뭐 어쨌든 그렇단 얘기다. 오해하지 마시라. 이 쯤에서 밝히지만, 아니 이미 서두에서 눈치챘겠다만 난 여자다.

 뭐, 어찌됐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자주 볼 수 없는 그의 외출길이었기에 나는 잠시 호기심이 발동했고 또 시장을 가서 장을 보는 그 길지 않은 순간 그의 스토리를 써내려가는 게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겠지. 차림새를 보아하니 이성친구 같진 않아. 뭐랄까. 이성을 만나러 갈 때의 특유의 멋내기라는 게 전혀 안 느껴지니까. 가방 하나 없이 바짓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가벼운 느낌으로 길을 나섰으니. 흔히 남자들이 그렇듯이 뒷주머니에 찔러넣은 지갑 정도가 다겠지? 머리도 살짝 부시시하고 걸어가는 뽄새도 즐겁다거나 뭔가 즐거운 일이 있다거나 하는 것 같진 않고. 그럼 그냥 친한 친구를 만나러 근처로 나가는 것이겠지. 시간대를 봐서 좀 멀리 차를 타고 나가서 친구를 만난 뒤 한 잔 들이키기에 나쁘지 않은 시간이야. 술집에 가서 맥주를 시켜놓고 이얘기 저얘기를 하겠지? 20대 후반의 남자들이 모여서 하는 얘기라곤 절반 이상이 여자 얘기일 거고, 자기네들 신변잡기도 약간 있을테고. 술 좀 마시고 피시방 가서 게임들을 좀 할 거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들. 그리고 이어지는 자잘한 이야기들. 술 마시는 호프 주변을 빙 둘러보고 사람 구경-특히 여자 구경-을 하겠지. 건너건너 테이블에 있는 여자는 몸매가 좋아. 대각선에 앉은 여자는 뭐 그냥 그렇네. 하면서. 

 그러다가 문득 '그렇다면 그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라는 질문이 머릿 속에 휑하니 나타났다. 내가 생각하는 그는 이런 모습이고 이렇게 놀 것이고 이렇게 움직일 것이고...라고 내멋대로 생각하고 내멋대로 만들어버리지만 내가 보는 그가 아닌, 그가 보는 나는 어떤 모습일까? 라고.

 풋

 하지만 그건 아마 당분간, 어쩌면 영원히 모르겠지. 내가 그와 친해지든가, 아니면 그와 어떤 관계가 있든가 해야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와 그 어떤 연결고리를 맺을 생각도 없고 그런 썸씽 따위 눈꼽만큼도 바라지 않으니까. 

 근데, 앞으로 그를 보면 난 이제 '그가 보는 나는 어떨까?' 라는 그 질문이 계속 머리에 맴돌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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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at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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