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314 꽃병, 다시

160314 꽃병, 다시 서재 2016. 3. 14. 01:07

시기상으로는 이제 가을이다. 한밤까지 내 몸을 괴롭히던 후텁지근하고 시큰한 열기가 내 곁에서, 아니 모두의 곁에서 사라진 것만으로 충분히 [여름]이 끝났음을 의식할 수 있지만. 문을 열어도 바람 한 점 없고 땀만 주르륵 흘러내리던, 그런 땡볕 더위는 한 풀 꺾인 것만으로도 충분히 여름의 부재를 느낀다. 이제 가을의 문턱에 접어든 것이다. 아직 낮은 더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여름은 다 지나가 버렸다. 내 속에서는.

 

그런데도 그는 [여름]이 못내 아쉬운 걸까?

 

창가의 문을 열어놓고 노오란 꽃병에 해바라기 몇 송이를 꽂아놓는다. 살짝 붉은 끼가 도는 노오란색 꽃병은 한낮의 햇볕까지 비추면 그야말로 샛노오란 노란색이 되어 해바라기보다도 더 강렬한, 살아있는 색깔을 보여준다. 본래 꽃병이라는 것이 꽃을 위하여, 꽃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있는 것인데 이 꽃병은 어떻게 된 게 꽃들이 꽃병을 돋보이게 해 준다.

 

이 꽃병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해바라기라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노란 장미도 붉은 장미도 청초하다는 흰 백합마저도, 수수하지만 많아서 강한 안개꽃마저도 이 꽃보다 도드라져 보이지는 않더라. 한낮의 이 꽃병을 이길 수 있는 꽃이란 세상에서 오로지, [해바라기] 뿐이다. 특히나 완전히 빠싹하게 말라서 툭 치기만 해도 바스러지기 직전의 해바라기는 이 꽃병과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의 강한 힘이 있다.

 

-빠싹하게 마른 해바라기야말로 가장 아름다우니까.

 

그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 꽃이 시름시름 시들어가기 시작하면 그는 가차 없이 물을 따라 버리고 그대로 꽃을 바짝바짝 말려버린다. 어중간하게 물 먹어가면서 시름시름 시들어가는 꼴은 영 뵈기가 싫단다. 막 사다가 꽂아놓은 생기 있는 파릇파릇한 해바라기이던가 아니면 차라리 바싹 말라 버리라며. 까다로운 사람 같으니라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꽃병에 금이 갔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희미한 금.

 

-, 금 갔네?

-.......어쩌다 보니까.

-다행이야, 안 깨져서.

-.......

-수전증, 다시 도졌어?

-요즘 들어서 심해진 것 같아.

 

한동안 잠잠하더니 그의 수전증이 다시 시작됐나보다. 마감 때 쯤 되면 극도의 스트레스와 그의 막강한 뒷심이 상쇄되어 표면으로 표출되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그것이 [수전증]이다. 그의 직업은 화가,[환쟁이]이다. 해외 유학파인 그의 그림은 뚜렷한 방향성과 확실하게 보이는 주제의식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쉽고 편하지만, 강한 그림]이라는 평을 들으면서 입소문을 타고 있다. 1년 만에, 가을 초엽에 전시회를 가지는 그에게 있어 여름의 끝자락은 그의 생활상에 정점으로 치닫는 시기이다. 물론 그것은 그의 전시회에서 큐레이터를 맡고 있는 나도 마찬가지지만.

 

꽃병이 깨지지 않았다니. 참 다행이다. 꽃병이 깨졌다는 건 아무 의미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하루하루 독기 오른 고양이마냥 신경을 바짝 세우고 작업하는 두 사람에게 있어서 사소한 일상의 변화도 매우 민감하게 느껴지는 시기에, [꽃병이 깨진다]는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다행이다.

 

-앞으로 꽃은 내가 관리할까?

 

-......

 

대답이 없다. 내키지 않는 모양이니 그냥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자. 그게 좋다, 아무래도.

 

가끔씩 느끼는 일이지만 그림쟁이의 그림을 파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림쟁이를 맞춰주는 것과, 그림쟁이의 연인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한 몸으로 해내는 것은 매우 힘들다. 공과 사의 분별력이 흐려지는 것은 물론이요, 그의 한 마디며 표정 변화, 거기에서 보이는 그의 심리적인 뒤틀림과 스케줄까지 애인으로서도, 큐레이터로서도 참견하게 되면 나는 한 사람인데 두 사람 몫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이도 저도 아니게 되는 일을 크게 벌리는 경우가 제법 많다. 원치 않지만 가끔 그런 식으로 흘러갔었던 일이 몇 번 있었고, 그로 인해 전시회를 중단할 뻔 했던 아슬아슬한 대형사고도 두어 번 있었고.

 

-, 다듬어 놨으니까 나중에 옮겨 담아 놔. 끼니 거르지 말고.

-.......

 

작업실로 들어가서 대답이 없는 그에게 나는 [전해지지 않을 말]을 하고는 작업실 앞에 쪽지를 써놓고 그의 집을 나간다. 이럴 때는 작업실에서 빨리 나오는 게 서로에게 좋다. 둘이 얼굴 마주보고 있어봐야 그저 힘만 빠지고. 며칠째 면도도 안 하고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않아서 폐인이 된 그의 모습이 측은하다 못해 안쓰럽지만, 그래도 그가 모든 것을 끝낼 때 까지는 참자. 아직은 아니다.

 

화랑으로 돌아오는 길, 개울 다리 앞에서 항상 공연을 하고 있는 아코디언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집시라고 했었던가. 다 달아 헤진 폰쵸를 길게 늘어뜨리고 한철 간 가죽부츠를 신은 여자와 모자를 눌러 쓰고 팔뚝 중간 정도 내려오는 칠부 소매의 티셔츠를 입은 남자, 이렇게 둘이서 노래를 불렀더랬다. 집시라며, 여기저기 떠돌다 같이 만났다며, 자신들을 소개한 두 사람. 매일 매일을 노래하고 연주하며 그렇게 번 돈으로 하루하루 입에 풀칠해 살아가는 사람들. 아코디언의 기운찬 소리를 한 발짝 밟고 올라가 그녀가 뽑아내는 그 허스키한 목소리는, 구성지고 야멸차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구슬펐다. 두어 달 전부터 여기에서 노래를 불러댔었는데, 날씨 좋은 날이면 이 앞에서 노래를 부른다고 했었는데.......

 

그네들 생각은 이쯤에서 접고 나는 화랑으로 가는 길을 서둘렀다. 오늘로서 지금 맡고 있는 전시회가 막을 내린다. 마지막 날까지 힘내야한다.

 

-이번 전시회, 좋았어.

-감사합니다.

-이거, 작가 분이 수고비로 좀 전해주라고 하시더라고. 받아.

-이런 거 안 주셔도.......

-나쁜 일 해서 받는 것도 아닌데 새삼스럽게 뭘 빼고 그래? 받아둬.

-, 그럼.......

-내가 주는 것도 아닌데 나 왜 생색내고 있지, 하하하

 

흰 봉투에는 10만 원 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다. 작은 수표보다는 더 큰 종이봉투가 거북스럽게 느껴진다. 봉투를 가방 안에 대충 찔러 넣고 다른 사람들과 같이 화랑의 마지막 정리를 도왔다. 어제까지 사람도 있고 따뜻한 조명도 있고 벽마다 화려한 그림들이 걸려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천장에 달린 형광등에, 세트들은 다 뜯겨져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그림들이 걸려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다. 항상 텅 빈 화랑에서 시작해서 텅 빈 화랑에서 끝나지만 만감이 교차하는 것은-특히 시작하기 전보다 끝난 다음 정리할 때가-어쩔 수가 없나보다.

 

-끝났으니까 한 잔 하러 가지들. 다들 어때?

-너무 갑작스러워요, 관장님. 그러지 말고 우리 금요일로 해요. 어때요?

-에이, 그래도 이런 날은 좀 달려줘야지. 안 그래?

-그렇긴 한데. 어차피 내일도 별다른 업무 없잖아요. 오늘은 정리만 하고 뒷풀이는 내일 해요, ?

-흐음, 그럴까? 그럼 내일 퇴근하고, 다들 좋지?

 

그러마고 일단 말은 해 놓는다. 어차피 그의 작업실에 들르는 것 말고 딱히 일정이 잡혀있지 않으니까. 오늘도 굳이 상관은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금요일이 좋은 모양이다. 어찌됐든 간에 마무리를 인부들에게 맡기고 화랑을 나왔다. 바람이 닿는 감촉이 한결 차가워졌다. 저번 주만 해도 열대야 때문에 땀에 절어 끈끈했던 살갗이 이제 와서는 살풋한 추위에 에인다. 비 한 번 왔다고, 날 지났다고 쌩하니 가을 같다.

 

-아무것도 안 먹었네.

 

대략 예상은 했지만 그의 냉장고는 점심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물병만 반이 빈 것을 보니 그래도 물은 마시고 살고 있나보다, 다행이다. 짬날 때 먹으라고 두었던 영양제도 안 먹고 탁자 위에 그대로 두었다. 방으로 들어가 보고 싶지만 이미 방문은 굳게 닫혀져 있고. 아마 내가 지금 냉장고를 열면서 한숨을 내쉬는 것도 모를 정도로 그는 그림에 목을 매고 있을게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그렇게 그림에 붙잡아두게 하는 것인지 3년이 지나도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단 한 번도 그는 내게 말해주지 않았고 나도 그에게 이유는 묻지 않았다. 한때는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아니, 이제는 생각지도 않는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리라. 쨌든 냉장고에다 마트에서 사 온 물을 넣어놓고 부엌을 한 번 돌아봤다. 그의 꼴짝 만큼이나 휑하니 아무 것도 없는 부엌을 보고 한숨이 새어나온다. 잠깐 정신줄을 놓고 멍하니 서서 휑한 부엌을 둘러보고 있자니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부스스하고 볼은 쏙 들어가고 눈이 퀭하다.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면서 시선을 마주치는데도 말이 없다, 그는 나에게.

 

-끼니는 못 챙겨도 뭐라도 먹고 하지.

-됐어.

-몸 상하면 전시회 때 사람들 대하기 좀 그렇잖아.

-큐레이터로서? 아니면 내 애인으로서?

 

날카로워진 그가 대뜸 던지는 한 마디. 신경이 많이 곤두서 있다는 건 알겠지만 가끔 저런 식으로 찔러대면 대책이 없다. 급소를 오차 없이 정확하게 한 방. 꼼짝도 못하는 상태가 되고 만다. 휴우.......

 

-왜 그래, ?

-언제나 그런 식으로 피해가지, 그렇지?

-작품에 그 열정을 쏟아. 나한테 그러지 말고.

-.......그냥 가. 됐다.

-,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참이야.

 

꽃병에 간 금이 조금 더 선명해 보인다. 해바라기는 그가 갈아놓았나 보다. 그 옆에 말리겠답시고 고스란히 놓아둔 해바라기가 영정 앞에 놓아두는 국화같이 보였다. 이파리는 쭈글쭈글해서 시들시들하고, 몇몇 이파리들은 안으로 오므라들었다.

 

-꽃만 걸어주고 갈게. 말려서 드라이플라워 쓸 거잖아.

 

나는 거실 끄트머리 어슴프레하게 어두워지기 시작한 밤의 창가로, 그는 내 등 뒤편 부엌으로 우리는 서로 몸을 틀어 반대로 걸어갔다.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에도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는다. 아니, 그의 시선은 공허하고 초점 없어서 나는 물론이요 그 무엇도 바라보고 있지 않다. 끄트머리를 잡고, 시든 해바라기의 물기를 가볍게 털어낸다. 그나마 바깥으로 고개를 빼고 있던 해바라기들이 더 고개를 떨군다. 아예 처음부터 꽃다발 채로 거꾸로 매달아 드라이플라워를 만들면 될 것을 꼭 생생한 순간의 해바라기를 보고 나서야 말려 버리고 만다.

 

-마지막에 살아있을 때의 해바라기가 말라비틀어진 해바라기하고 겹쳐보여서 더, 강렬하게 느껴지니까.

 

내가 언젠가 왜 이 귀찮은 수고를 해야 하는 거야?’라고 물었을 때, 그가 나에게 해 준 대답이었다.

나는 그 때도 그를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냉장고를 열고서 반쯤 남은 물병을 꺼내는 그. 뚜껑을 열어 시원하게 들이키고서는 창가를 잠시 바라본다. 역시나 나와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다.

 

-오늘 전시회 끝났거든. 작가가 그림 많이 팔려서 기분 좋다고 다들 주더라고.

 

생뚱맞게 나는 이 말이 왜 튀어나왔을까. 그와 제대로 말이라도 해 봐야겠다는 생각에 뱉어낸 말이 하필이면 이런 말이라니.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그의 시니컬한 시선은 이미 내 가슴팍에 팍 꽂히는 게 보인다. 냉장고에 등을 비스듬하게 기대고 창가를 바라보는 그 자세로 그는 얼어있었다. 야릿하고 날카로운 그의 시선은 이미 나를 사정없이 찔러대고 있었지만 웬일인지 내 몸은 그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다. 속으로는 바짝바짝 타 들어가 새까맣게 졸여지는 내 마음 한구석으로 아무렇지도 않음이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그래서?

-그냥 그랬다고. 그래서 기분 좋아서 이거저거 사 들고 들어왔.......

 

냉장고를 열더니 오늘 사 온, 아직은 미적지근한 물통 두 개를 뺀다. 미적지근한 물통의 뚜껑을 딴다. ‘딸깍하고 기분 좋게 따지는 물병. 싱크대 앞에 물병을 가지고 가서는 한 마디 던진다.

 

-이것도, 그 놈이 준, 그 돈으로, 사 온 거지? 그렇지?

 

또박또박, 토시 한 자도 안 틀리고 저렇게 얘기를 뱉어내는 그의 태도는 그나마 구석에 찌그러뜨려놓은 내 마음 속의 [아무렇지도 않음]을 잡아 끄집어내고 만다.

 

-버리기라도 할 거야? 왜 그래? 사람이 왜 그렇게 까칠해? 액면가 그대로 못 받아들여? 일해주고 잘 팔렸다고 수고비 줬다고. 나만 준 게 아니고 화랑 사람 다들 똑같이 줬다고. 그게 나쁘니? 나쁜 거야? 그리고 그 돈으로 산 거 아냐. 수표라서 오늘은 깨지도 못 해. 월급으로 산거니까 그냥 입 다무리고 마셔. 그거 마신다고 안 죽어. 아무리 까칠하다고 해도 이건 너무했잖아? 내가 말실수한 거? 그래, 인정할게. 그런데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다이렉트하게 반응을 보여줘야겠어?

 

아무리 수도꼭지를 잠그려고 해도 [한 번 터진 수도]는 그냥 콸콸 잘도 쏟아져 나온다. 손가락으로 구멍을 쑤셔 넣어봐야 막히지도 않을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겠다고 애를 쓰지만 애꿎은 수돗물은 잘도 콸콸 쏟아져 나온다.

 

-그래, 이왕에 얘기 나온 거 다 해 보자.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번 작업 할 때마다 그래야겠어? 작년에 작품 준비한다고 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어. 요즘 나 여기 오기만 하면 살얼음판 걷는 거 같다고. 알아? 내가 죄 지은 것도 없고 나도 전시회 기획하는 사람이라서 이때가 제일 예민하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라니까 해도 해도 너무 한 거 알아? 기껏 남이 먹으라고 해 준 음식에는 손도 안 대고 붕어마냥 물만 뻐끔뻐끔 마셔대고. 낮에 뭐라고 했는지 기억은 나니? 너 낮에 내가 하는 말마다 다 씹고 말도 안 하고. 요 며칠 동안 니 입에서 나 좋은 소리 들어본 적 없는 거 아니? 작업한다고 위해주면 고마운 줄이라도 알아야지, 이건 고마워하기는커녕 챙겨주는 사람한테 틱틱 거리기나 하고, 이젠 그것도 모자라서 쓸데없는 데 화까지 내가면서........

 

나의 []은 가빠질 대로 가빠지고, 절로 식식대고 있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들시들한 해바라기]는 이미 내 손을 떠났다. 제발 여기서 멈춰줬으면 하고 바래도 바래보아도 이미 모든 것은 [내 이성을 떠나고 있고, 또는 떠났다.] 이 자리에 있는 나는 이미 털썩 주저앉아 식식대며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한 손으로 창가를 붙잡고 위태롭게 흔들거리고 있는 여자다. 될 대로 되라지. 나도 모르겠으니까.

 

물병을 잡고 있던 [그의 손]이 떨린다. 파르르 떨리는 것이 흔들리는 나의 시선 속에서 그것만, 그것 하나만 눈에 들어온다. [한 순간 무너지는 균형]으로 인해 그는 물병을 놓치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물병은 싱크대와 강렬한 만남을 갖는다. 둔탁한 소리가 방에 쩌렁쩌렁 울리고 콸콸콸물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흔들리는 모습과, 물병에서 물이 터져 나와 싱크대 배구수로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더욱 더 나를 아득하게 끌어내린다.

 

-이제는 지친다. 작업한다고 방에 틀어박힐 때마다, 바깥에서 내가 뭘 할지 한 번이라도 생각은 해 봤었니? 하루, 이틀. 그래 좋아. 그 정도면 참아줄 수 있어. 저번 달부터 여기 와서 너하고 얼굴 마주치면서 내가 몇 번이나 얘기한 줄 알아? 그러면서 니가 내 얼굴을, 내 눈을, 몇 번이나 쳐다봤는데? 니 머릿속에 내가 있기는 한 거야? 난 도대체 3년 동안, 너한테 뭐였니? ? 말을 좀 해 봐. 말을. 왜 날 이렇게까지 하게 만드는 거냐고, ?

 

말은 왜 이렇게 해도 해도 끝이 없는지. 더 나올 말이 없을 것만 같은데도 입은 계속 움직이고 머리는 열심히 타이핑한다. 바닥까지 그러내고 닥닥 긁어서 다 퍼내려간 것 같은데 말할 때마다 하나씩 생각나는 꼬락서니는 도대체 뭐니? 나 왜 이렇게 비참하고 초라하고 서글프니?

 

그가 다가온다. 나에게. 눈물로 범벅되고 어질어질한 그 시선 사이로 그가 셋도 되고 넷이 됐다가 다섯도 되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이미 시들어 풀 죽은 해바라기는 와다닥 떨어져 반쯤은 내 엉덩이와 발에 짓이겨졌고 나는 되도 않는 짓을 발악이랍시며 하고 있다. 아무리 몸을 뒤로 밀어도 이제는 갈 곳이 없건만. 그가 이윽고 거대한 형상이 되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달려든다. 그의 큼지막한 손이 내 어깨를 누르고 나를 자빠뜨린다. 벽을 타고 흘러내려가 나는 바닥에 어정쩡하게 누워있고 그는 나의 위에 올라타고서 뚫어질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새카만 그의 실루엣 사이에서 밝게 빛나는 두 눈. 그 눈동자 속에 보이는 나의 모습. 마스카라는 번지고 흐려져서 눈두덩이는 시퍼렇고 광대뼈를 가르고 바깥으로 얼굴을 타고 그어진 뚜렷한 선. 훌쩍거리는 코. 반쯤은 벌려져, 또 무언가 말을 뱉어내려고 하는 입술.

 

-..............떨어져.......!

 

양손으로 그의 허리춤을 잡고 그를 옆으로 밀쳐낸다. 생각보다 쉽게 그는 벽으로 떨어져 나간다. 나는 몸을 다시 끌어올리고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꺼이꺼이 울고, 그 사람은 벽에 등을 대고 새우처럼 웅크려서 그저 그러고만 있다. 울지도 못하고 더 퍼부어대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못하고 그도 나도 그저 그러고만 있다. 실은 데레데레 엉키고 꼬여서 잡아당기고 풀려고 해 봐도 더 엉켜 들어갈 뿐이고,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풀어야 할 지 감조차도 오지 않는다.

 

-.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 꽃병의 균열이 서서히 벌어지고 있고 꽃병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한다. 해바라기들이 후두둑-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꽃병은 그것마저 견디지 못하고 두 개로 갈라진다. 서서히 관성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 잡아당겨지는 거대한 두 개의 파편은 이윽고 완전히 벌어지고 해바라기들은 본격적으로 사방팔방으로 떨어진다. 이미 물은 다 흘러내려 창틀을 적시고 나를 적시고 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밖으로 비집고 터져 나오는 그것들로 인해 꽃병은 더욱 더 빠르게 두 동강 나고 맑고 경쾌한 소리를 내며 두 조각으로 쪼개져 창틀을 구른다. 해바라기들도 고개를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떨어져 버리는가 하면 내 품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만하자.

 

품에 안은 꽃들을 툴툴 털고 나는 창틀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신히 두 다리로 버티고 서서 휘청거리는 몸을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며 걸어가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백을 챙긴다. 이것저것 어질러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기고 백을 뒤져 물티슈와 손거울을 꺼낸다.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던 화장 얼룩을 [물티슈]로 닦아내고 거울을 보면서 흐트러진 나를 다듬고 정신을 차린다. 다섯 개로 보이던 내가 셋도 되고 넷도 됐다가 겨우 [하나]로 돌아왔다. 아직도 벽에 등을 대고 웅크리고 있는 그. 창가에는 금을 따라 갈라진 꽃병이 아슬아슬하게 바닥으로 떨어질까 말까 하며 구르고 있고 창틀 끝에 매달린 물방울들은 아래로 떨어지려고 있는 힘껏 늘어지고 있고 내가 앉았던 자리에 짓이겨져 있던 해바라기와 내 품에 고이 안겼다 떨어진 해바라기가 어지러이 흩뿌려져 있다.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기고서 신발을 고쳐 신고 나는 현관으로 간다.

 

-갈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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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YatE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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